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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위 선열 > 동암 차리석
동암 차 리 석(車利錫) 선생 연보 (1881 ~ 1945)

호 : 동암(東岩)
일명 : 서입환(徐立煥), 차필성(車必成)
관향 : 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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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1세) 7월 27일 평안북도 선천에서 차시헌의 삼남으로 출생하다.
1907년 (27세)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대성학교 교사가 되어 후진양성, 신민회에 가입 국권회복운동에 전념하다.
1911년 (31세)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피체, 투옥
1912년 (32세) 10월 18일 데라우치 조선총독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8년 언도되다.
1913년 (33세) 3월 20일 석방되다.
1919년 (39세) 향리에서 3· 1만세 투쟁에 가담 활동하다. 상해로 망명 8월 21일 독립신문이 창간되자 기자로서 조동호(趙東祜)와 함께 기자로 활동하다.
1922년 (42세) 2월 임시의정원 평안도 선출의원이 되어 임정에 적극 참여하다.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다. 이동녕 등과 시사책진회 조직 활동하다.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조직하고 안창호 등과 활동하다.
1930년 (50세) 의정원회의에서 부의장으로 선출되어 1935년까지 봉직하다. 의장 이동녕을 보좌하고 가끔 사회를 맡아 회의를 진행시키면서 입법 활동을 전개하다. 김봉준, 김홍서 등과 같이 상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다.
1931년 (51세) 3월까지 흥사단 홍보지 발행, 민족계몽운동을 펴다.
1932년 (52세) 5월 임정의 도장 각종 문서 등을 가지고 항주로 이전하다. 이동녕, 이시영, 송병조와 같이 가흥에 피신했었다. 11월 28일 개최된 의정원회의에서 이동녕, 김구, 조성환, 신익희 등과 함께 국무위원에 임명 1945년까지 국무위원 겸 비서장으로 광복투쟁에 몸 바치다.
1933년 (53세) 12월까지 의정원의원으로 윤봉길의사 의거 이후 항주에서 혼란된 임시정부를 수습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다.
1935년 (55세) 송병조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사수하고 재건에 노력하다. 임시정부의 법통사적 명맥을 유지하기 위하여 광동에 있는 김붕준, 양명진(楊明榛) 항주에 있는 이시영, 조완구 가홍에 있는 이동녕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임시정부의 재건과 구심점으로서의 임무를 강조, 마침내 다시 합류하게 하다. 따라서 11월 13일 임시정부를 사수하여 국무위원 취임식을 거행하게 되는데 이때 주석에 이동녕, 내무장 조완구, 외무장 김구, 재무장 송병조, 군무장 조성환, 법무장 이시영등을 중심으로 새로 조직케 하고 자신은 비서장에 임명되다. 11월에 새로운 여당으로 이동녕, 김구등과 한국국민당을 조직하다.
1939년 (59세) 5월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이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이 될 때 집행위원이 되다.
1943년 (63세) 5월 8일 중경에서 개최된 제3기 전당대회에서 중앙감찰위원장에 선출되다.
1945년 (65세) 9월 9일 환국 준비중 조국 땅을 밟지 못한채 영면하다. 9월 12일 장례식을 중경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다수한 임정관계자가 참집한 가운데 엄수되다.
1948년 9월 22일 김신에 의하여 유해가 국내로 모셔져 효창원에 안장, 사회장이 치러지다.
1962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국민장)이 추서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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